8일 벤처캐피탈(VC) 업계 등에 따르면 SV인베스트먼트는 실리콘박스의 2024년 시리즈B 투자 라운드에 참여해 600만달러, 당시 환율 기준 약 80억원대의 자금을 투자했다. 해당 라운드에서 국내 VC 가운데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실리콘박스는 당시 총 2억달러 규모의 자금을 조달하며 유니콘 기업에 올라섰다.
이후 기업가치는 추가 상승했다. 실리콘박스에 따르면 회사는 시리즈B를 통해 누적 3억250만달러를 조달했고 기업가치는 15억5000만달러까지 높아졌다. 원화로 환산하면 약 2조원대 규모다.
실리콘박스는 2021년 설립된 싱가포르 기반 첨단 반도체 패키징 기업이다. 특히 글로벌 반도체 기업 마벨테크놀로지(Marvell Technology)를 창업한 고(故) 세하트 수타르자(Sehat Sutardja) 박사와 웨일리 다이(Weili Dai), 한국인 반도체 패키징 전문가 김병준(BJ Han) 박사가 공동 창업했다.
수타르자 박사는 1995년 웨일리 다이, 판타스 수타르자와 함께 마벨을 설립한 글로벌 반도체 업계의 대표적인 엔지니어 출신 창업자다. 그는 440개 이상의 특허에 발명자 또는 공동발명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이후 김병준 박사 등과 함께 차세대 반도체 구조인 칩렛과 첨단 패키징 시장을 겨냥해 실리콘박스를 설립했다.
실리콘박스의 핵심 사업은 여러 개의 반도체 칩을 하나의 시스템처럼 연결하는 '칩렛(Chiplet)' 기반 첨단 패키징이다. 기존에는 하나의 거대한 반도체에 CPU·GPU·메모리 등의 기능을 집적하는 방식이 주를 이뤘지만, 미세공정의 비용과 물리적 한계가 커지면서 각각의 기능을 담당하는 작은 칩을 만든 뒤 초고속으로 연결하는 칩렛 구조가 차세대 반도체 기술로 부상하고 있다.
특히 생성형 AI와 고성능컴퓨팅(HPC)에서는 연산 칩과 메모리 사이에서 막대한 데이터를 빠르게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에 칩 자체의 성능뿐 아니라 여러 칩을 얼마나 빠르고 효율적으로 연결하느냐가 전체 시스템 성능을 좌우한다. 이에 따라 첨단 패키징 기술이 AI 반도체 공급망의 핵심 영역으로 떠오르고 있다.
실리콘박스는 자체 SiPlet 기술과 대면적 패널레벨 패키징 기술을 활용해 칩렛의 설계부터 최종 제조까지 통합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기존 웨이퍼 단위가 아닌 대형 패널에서 반도체를 패키징함으로써 생산성과 원가 경쟁력을 높이는 것이 특징이다. 회사 측에 따르면 대면적 패널레벨 공정은 기존 웨이퍼레벨 방식보다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패키징 규모를 6~8배까지 확대할 수 있다.
사업은 이미 연구개발 단계를 넘어 양산 단계에 진입했다. 실리콘박스는 싱가포르에 7만3000㎡ 규모의 첨단 반도체 패키징 공장을 구축했으며 공장 완공 후 불과 3개월 만에 자체 SiPlet 공정의 양산에 돌입했다. 2026년 1분기 기준 싱가포르 공장에서 누적 2억5000만개 이상의 제품을 출하했다고 회사 측은 밝혔다.
유럽 생산거점 확보에도 나서고 있다. 실리콘박스는 이탈리아 피에몬테주 노바라에 최대 32억유로를 투자해 첨단 반도체 패키징·테스트 공장을 구축하는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해당 시설에서는 패널레벨 패키징과 이종집적 기술 등을 활용해 AI·대규모언어모델(LLM)·HPC·전기차·자동차·엣지컴퓨팅 등에 사용되는 차세대 반도체를 생산할 계획이다.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도 이 프로젝트에 약 13억유로 규모의 이탈리아 정부 지원을 승인했다. 생산은 2028년 시작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신규 공장을 통해 약 1600명의 직접 고용도 예상된다.
AI 확산으로 첨단 패키징 시장 자체가 급성장하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FOPLP(팬아웃 패널레벨 패키징)·유리기판 패키징 시장은 2024년 약 6억5000만달러에서 2030년 81억달러 이상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2030년 AI·HPC 분야가 전체 FOPLP 시장 매출의 45.6%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SV인베스트먼트 입장에서는 리벨리온에 이어 AI 반도체 밸류체인 내 또 다른 대형 포트폴리오를 확보한 셈이다.
SV인베스트먼트는 AI 가속기 기업 리벨리온에 누적 450억원 이상을 투자한 데 이어 CXL 기반 메모리 반도체 기업 엑시나에 약 260억원, 실리콘박스에 약 80억원을 투자했다. 이 밖에도 AI 인프라 운영 소프트웨어 기업 래블업 등 AI 생태계 전반에 투자를 확대해왔다.
특히 리벨리온이 AI 연산을 담당하는 NPU를 개발한다면 엑시나는 CXL 기반 메모리 확장, 실리콘박스는 칩렛과 첨단 패키징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SV인베스트먼트의 포트폴리오가 AI 반도체 밸류체인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평가다.
SV인베스트먼트 관계자는 앞서 실리콘박스 투자와 관련해 마벨테크놀로지 초기 공동창업자인 세하트 수타르자 박사를 비롯해 반도체 패키징 분야 베테랑들이 설립한 기업이라는 점을 투자 배경 가운데 하나로 설명한 바 있다.
AI 반도체의 경쟁축이 단순한 칩 설계를 넘어 메모리와 칩렛, 첨단 패키징 등으로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만큼 향후 실리콘박스의 기업가치 상승 및 투자금 회수 여부에 따라 SV인베스트먼트의 AI 반도체 투자 성과 역시 추가로 부각될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석 데이터투자 기자 pr@datatooza.com












